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로 소돔의 120일 (문단 편집) == 여담 == 감독의 동생인 귀도 파졸리니는 2차 대전 당시, 본 영화의 배경 국가인 [[살로 공화국]]에서 반 파시스트 [[레시스텐자]] 활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리코네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매우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파솔리니와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음악을 맡아준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평소 파졸리니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있던 모리코네는 후일 파졸리니의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 <파졸리니 -이탈리아의 어떤 범죄->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파졸리니 감독과 친했던 영화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가 목소리 더빙 연기로 참여했다. 영화는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옥의 문, 기벽의 장, 똥의 장, 피의 장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장의 이름에 걸맞는 이야기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똥의 장은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 스카톨로지 관련 내용이고 피의 장은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 남녀 청소년들을 성폭행하고, 배설물을 이용해 고문하며, 마지막에는 혀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는 등 각종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특히 똥의 장의 경우 본편이든 DVD나 블루레이든 아무 삭제나 순화도 전혀 거치지 않고 원작 재현 그대로 나온다.] 한 출연 배우의 증언에 의하면 의외로 당시 촬영장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참고로 작중에 나오는 똥은 초콜릿과 오렌지 마멀레이드, 씹히는 재료들로 만들었고 오줌은 탄산을 다 날려보낸 맥주를 썼다고 한다. 해당 배우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야 끔찍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아니 끔찍한 영화가 아닌데 오줌이랑 똥을 왜 만들겠냐고-- 그리고 알려진 바와 달리 의외로 대역으로 찍은 장면도 있다고. 다만 배우들이 촬영을 하면서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만든 직후 파졸리니가 의문의 [[린치]]를 당해 살해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검 결과 여러 사람에게 흉기로 구타되어 살해되고 얼굴도 자동차에 깔려서 짓이겨졌으나 당시 경찰은 용의자의 단독범으로 수사를 종결했고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소년은 30년 후 자기는 협박당해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고백한다. 파졸리니는 이전부터 [[붉은 여단]]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우익의 공격 대상이었으나, 학생과의 동성애 혐의로 문제가 커져서 공산당과도 결별하여 좌익과도 사이가 나빴고 이탈리아 영화계에 도사리던 [[마피아]]도 끔찍히 싫어해 그야말로 사방에 적투성이었다. 심지어 소돔 120일에 출연한 아역 배우의 부모가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진지하게 거론되지 않은 낭설이다.[* 파졸리니 감독의 친구의 자녀가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살인범으로 투옥된 주세페 펠로시는 영화 업계와는 관련이 없고 진범은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 주세페 펠로시는 출소 이후 2000년대부터 각종 책과 방송 출연을 통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다니다[* 시칠리아 억양을 쓰는 남성 3명이 파졸리니를 죽였다고 한다.] 2017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파졸리니가 우익 마피아 세력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 당했다는 설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의 유럽이니까 제작이 가능한 영화였다. 우선 당시 이탈리아는 지금보단 성에 대해 보수적이지만 미국이나 영국보다는 아니었던 데다[* 특히 영미권은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기 때문에 영화라도 할지라도 미성년자를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하는 장면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68혁명]]의 흐름 등으로 더 자유로운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만 해도 유럽 선진국조차 아동 포르노가 판매될 정도로 [[아동 성범죄]]에 대해 심각한 인식이 없었으며 아역배우들에 대한 인권의식도 매우 낮았다. 만약 지금 이 작품을 만든다면 감독은 엄청난 비판을 받고 아동 성폭력 및 아동학대로 고소당할 것이다. 의외로 메이저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제작에 참여했다. 파졸리니 감독도 당시 이미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하던 명감독이었고 사후에 개봉되어 꽤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단 너무도 외설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검열 당하긴 제격인지라 세계적으로 정식 개봉한 국가가 많지는 않았다. 유럽 일부 국가 및 일본 정도. 1976년 서독에서는 개봉되었는데, 원래 이 영화는 [[슈투트가르트]] 지방법원이 불법 포르노로 분류하여 상영을 금지하였지만 며칠 후 그 판결이 번복되어 영화는 전국적으로 배급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당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불법이었고[* 현재는 아니다.] 런던의 한 아트하우스 영화관에서 몰래 상영하는 바람에 경찰에게 압수수색을 당하기까지 했다. 90년대부터 00년대 초중반 영화 동아리들에서 이 영화의 비디오를 몰래 구해서 신입생들에게 보여주고, 수많은 학생들이 구토를 하며 뛰쳐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미카엘 하네케]], [[가스파 노에]],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에서도 상영이 금지되었는데, 오하이오주 한 서점[* LGBT 서점이었다고 한다.]의 주인이 이 영화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자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의 관람을 꺼렸다고 하며, 결국 생전에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